4시 50분이다.
홋카이도에서 최초로 세미더블 침대에서 자고 일어났다. 계속 다다미방에서 자다 비좁은 세미더블 침대에 두명이 끼어자려니 몸이 먼저 불편해한다.
어젯밤 10시 반쯤에 삿포로에 도착했다. 6시간 버스 타면서 잤어야 했는데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다 내리기 30분 전에야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고, 오도리 버스센터에 내렸을 때는 한발짝도 움직이기 싫은 상태였다. 10시부터 할증붙는 택시가 최선의 선택이었고, 삿포로역 북쪽 출구 앞의 호텔까지 890엔이 나왔다.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지만 두 사람이니 지하철을 타도 총 620엔이다. 그나마 택시 기사가 삿포로피노호텔의 위치를 몰라 근처의 아스펜 호텔로 일단 이동했다. 다행히도 아스펜호텔에서 모퉁이 돌면 바로 피노호텔이 나온다. 작년에 개업한데다 간판도 작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건 사실이다. 일본호텔답게 방은 작았지만 욕실이 넓은 편이다. 욕조도 이제껏 본 호텔 중 가장 컸고 방도 깔끔했다.
오늘은 샤코탄과 오타루를 하루에 돌아볼 계획이다. 가이드투어도 생각해봤지만 샤코탄이 무슨 산골 오지도 아니고, 욕심 부리지 않고 버스 시간 되는데까지만 조용히 즐기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대중교통으로 삿포로에서 샤코탄과 오타루를 모두 돌아보는 방법 중 가장 빠른 교통편은 다음과 같다.
삿포로발 06:12 요이치 07:32 (1050)
요이치 07:36-카우이미사키 09:20
카무이미사키 12:12 - 이리카카이칸 12:39
이리카카이칸 14:10 - 오타루 15:55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어차피 내일이면 서울로 돌아간다. 마지막인데, 못할 것도 없다.
삿포로에서 요이치로 가는 기차는 Lacal train이다. 우리나라 인천선 정도 되는듯한데 모든 역에서 정차한다. 기차가 도착하자마자 뛰어올라 자리 잡고 편의점에서 사온 도시락을 먹고는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유리창에 기대 자다가 눈을 떠보니 오타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린다. 아까 한모금 마시고 그대로 창턱에 올려놓은 오렌지 쥬스를 마시며 요이치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아침 출근시간이라 직장인과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많이 타고 내린다.
7시 32분.
드디어 요이치다. 4분내에 시내버스로 환승해야 하는 부담감에 걸음이 빨라졌지만, 계단을 통해 개찰구로 나오면 바로 역 출구다. 기차에서 내려 버스정류장까지 2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7시 36분 버스에 올라 두 정거장도 지나기 전에 다시 잠들었다. 1시간 44분이나 걸리고, 샤코탄미사키가 이 버스의 종점이기 때문에 자다가 못 내릴 염려도 없다.
시마무이 해안 입구 쯤에서 눈을 떠 창밖을 보니 눈부신 바다가 빛나고 있었다. 바다 밑의 돌이 비쳐보일 정도로 맑고 투명한 물빛이 먼 바다로 나가면서 신비로운 푸른빛으로 변한다. 먼바다의 푸른물에서 하얀 파도가 솟아올라 달려오다가 부서진다. 이렇게 투명하게 빛나는 바다를 본적이 있던가.
드디어 카무이미사키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미친듯이 불어오는 바람에 정신이 나갈 지경이다. 바람막이를 입고 곶까지 걸어올라가는데 사방팔방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걸음을 멈출 때도 있었다. 거센 바람 탓에 풀도 나무도 다들 키가 작다. 그리고 이 바람 속에서도 고운 야생화가 만발했다. 바닷바람에 오랫동안 침식된 바위가 신기한 모습을 보인다. 바닷물의 색깔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큼 아름다웠다.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정도의 바람 속에서 본 카무이미사키의 풍경은 경외감마저 들었다. 아이누족이 신이 머무는 곳으로 신성하게 여겼던 이 곳. 인간의 힘을 훨씬 넘어서는 자연의 위대한 조화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아진다. 인간으로서의 특권 의식이 없던 시절, 위대한 자연은 신으로 숭상받았을 것이다.
바람에 머리 휘날리며 다시 내려와 휴게소에서 해물카레 하나 먹어치우고 씩씩하게 다시 나왔다. 곶 끝까지 가는 길과, 반대편으로 올라가는 두 가지 길이 있는데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올라갔다. 바람이 불어도 햇볕에 강한데다 날씨 자체도 더워서 금세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그래도 끝까지 올라가니 아름다운 샤코탄의 바다를 양쪽에서 볼 수 있다. 양편으로 바다를 내려다보는 경험, 흔치는 않을 것이다.
이곳을 대중교통편으로 오는 사람은 거의 없어보인다. 대개 단체 관광버스를 타고오는 것 같았다. 사진을 찍고 나무계단을 내려오는데 단체 관광버스에서 내린 일본인들이 한무리 다가오는 그때에, 하필이면 그때에 난 나무계단에서 넘어져버렸다. 사진 찍다가 발을 헛디뎠는데 발목이 꺾이면서 꽤나 아팠다. 하지만 그때는 아픈 것보다는 민망해서 못 일어났었다. 다행히도 별로 아프지는 않았는데 황당하게도 이틀이 지난 귀국 다음날부터 엄청나게 아파 걷기도 힘들어졌다.
12시 12분.
다시 버스를 타고 시마무이해안으로 향했다. 시마무이해안입구에서 내리면 되는데, 내려보니 막막하다. 바다는 냄새조차 나지 않고 그냥 시골이다. 할 수 없이 바로 앞의 우체국에 가서 물어보니 우체국 직원이 길가에까지 나와 길을 알려줬다. 직원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시마무이해안입구라는 표지판이 멀리 보인다. 그 방향으로 한참을 가다 그 표지판 앞에서 좌회전, 계단을 따라 죽 올라가면 터널이 나온다. 터널을 지나 펼쳐지는 풍광도 멋지지만 다시 계단을 한참 내려가 바닷가의 돌 위에 앉아 즐기는 운치도 그만이다.
단체관광객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파도소리 밖에 남지 않는다. 오랫동안 물살에 깎여 둥글둥글한 돌 위에 앉아 아름다운 물빛을 몇시간이고 지켜보고 싶었다. 버스시간 때문에 일어나는 아쉬움에, 언젠가는 꼭 다시 오겠다고 결심했다. 그때는 차를 빌려서, 혹은 자전거로 시간에 묶이지 않고 온전히 나만을 위한 여행이 되기를.
오타루행 버스에서도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아마 요이치 쯤에서 깬 것 같다. 오타루역에 도착하자 안도감이 밀려든다. 왓카나이, 리시리, 레분에서도 그랬지만 이게 과연 가능할까라는 걱정에 노심초사했던 일정들이 모두 순조롭게 진행되어 다행이다. 걱정 때문에 오히려 많은 정보를 모으게 되고, 그만큼 준비를 하기 때문이 아닐까. 삿포로행 기차표를 미리 사두고 관광안내소에서 한국어 지도를 받았다. 하지만 언뜻 보기에도 한국어 지도가 일본어 지도에 비해 훨씬 부실하다. 주요 관광지의 표시는 되어있지만 길을 찾을만한 랜드마크도 부족했고 한자표기가 되어있지 않아 오타루 관광 내내 두 지도를 함께 봐야했다.
일단 역앞의 오타루 프라자를 거쳐 운하 주변을 산책하고 오르골당본관 주위 관광 후 스시를 먹는 게 목표였다.
운하까지는 순조로왔다. 오타루프라자에서 목걸이도 하나 샀고 명성 높던 운하의 말도 안되는 현실에 절망하기도 하고. 많은 이들이 지적하지만 확실히 오타루운하는 사진의 힘이다. 지저분한 물에 약간 냄새도 나고, 이게 왜 유명한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하지만 오르골당본관까지 가는 도중 길을 잃었다. 분명 지도 방향대로 가고는 있는데 주변 풍경이 너무 황량한거다. 결국 편의점 직원에게 한블럭 건너편이 관광지역이라는 설명을 들어야했다.
이 지역은 수학여행 온 학생들과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꺄아꺄아 거리며 사진도 찍고, 유명한 과자점에서 뭔가 한보따리씩 들고나온다. 기타이치3호관, 오르골당본관 등등. 그저 주위에 보이는 대로 들어갔더니 정확한 이름은 모르겠지만 하여간 유리공예품과 오르골은 질릴 정도로 많이 봤다. 하나같이 섬세하고 예뻐서 사고 싶다는 충동을 이기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 가게 뿐만 아니라 이 지역 자체가 동화를 기억하는 사람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꿈의 세계를 재현한 게 아닐가 싶을 정도로. 그리고 한국인이 많이 보인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차림에 한국어가이드북을 든 여성도 여럿 보이고 단체 관광객인듯한 사람들도 보였다. 왠지 다들 나보다 예쁘게 차려입고 곱게 화장하고 왔더라. 그러고보면 난 예쁜 옷 입고 예쁜 사진 찍는 그런 여행과는 인연이 없어보인다. 항상 산넘고 물건너는 강행군이었지....
오타루역으로 돌아가는 방향으로 스시가게들이 밀집해있다. 왠지 맛도 다 평준화된듯해서 아무데나 들어가도 될 것 같다. 한군데 들어갔다가 아직 준비중이라서 나오고, 다른 집에 들어갔는데 스시요리사가 젊은 남자였다. 왠지 연륜깊은 아저씨가 있어야할 것 같은 느낌이지만 군대도 안가는데 일찌감치 일한다고 이상할 건 없겠지. 게다가 재료가 좋은지 음식도 맛있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역으로 가는 길에 한 과자점에서 아이스크림과 푸딩을 샀는데 한시간쯤 간다니 드라이아이스 포장도 해준다. 아이스크림은 기차 안에서 낼름 먹어버렸지만.
오타루에서 삿포로까지는 쾌속에어포트로 55분이 걸린다. 이번에는 잠들지 않고, 어두워져가는 창 밖을 보며 삿포로역까지 왔다.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간다. 여행의 마지막날, 샤코탄에서 광대한 자연과 아름다운 바다를 봤고 오타루에서 완벽하게 인공적인 꿈의 동화를 봤다. 여행의 마무리가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