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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협한 틀에 갇혔다는 걸 알게 될 때 Lane`s daily life

작년 6월 마지막 주.

헬싱키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체크아웃 후 짐을 맡겨둔 호텔은 중앙역 바로 앞이었고 시내에서 공항은 30분이면 갈 수 있었다. 눈이 시리도록 새파란 하늘을 보며 수오멘린나 요새에서 오전 시간을 보냈다. 민소매 하나 입고 맘껏 살을 태우며 풀밭에 누워서 싸들고온 샌드위치를 까먹는, 특별히 뭘 하지 않아도 되는 마지막 시간이었다.

백주대낮부터 치근대는 인도놈 떼내느라 짜증낸 기억만 없었어도 정말 완벽했을 그 오전을 보내고 다시 배를 타고 돌아왔다. 항구에서 신용카드까지 받는 노점 시스템에 감탄하며 마지막 기념품을 사고 중앙역을 항해 걷다가 퀴어 퍼레이드 행렬을 만났다. 역시 북유럽의 리버럴함이랄까. 퀴어 축제를 처음 보는 건 아니지만 비장하지도, 결연하지도 않은 그 뉘앙스가 재미있었다.

가장행렬인양 코스튬까지 준비한 사람도 있고 무지개 깃발 하나 걸치고 가는 사람도 있고, 길가에서 음악에 맞춰 춤추는 애기 손 잡고 같이 구경하는 부모도 있었고 구경하던 이를 행렬의 누군가가 부르자 반갑게 뛰어가서 행렬 속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 와중에 몸에 앞뒤로 성경구절이 적힌 판넬을 걸고 확성기로 당신들의 죄를 회개하라고 외치는 동성애 반대주의자도 봤다.

이 모두가 아주 자연스러웠다는 점이 제일 부럽고 신기했다. 그 모두가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는 분위기이기에 이렇게 편안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유럽에서 퀴어퍼레이드 행렬에 대고 성경말씀 전도하는 근본주의자를 볼 줄은 몰랐지만 퍼레이드 참가자들의 조롱과 냉소, 기념촬영용 포토스팟 등등으로 쓰이는 걸 보면 심각한 생각 따윈 들지 않았다. 조용한 줄로만 알았던 이 도시에서 길을 메우고 퍼레이드를 벌이는 벌일 줄이야.

그러다 행렬 중간을 보고 머리를 한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전동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끼어있었다. 나름 리버럴하고, 편협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자만감에 돌을 맞은 심정이랄까. 휠체어 조종 외에는 거의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로 불편해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가 축제를 위해 한껏 치장하고(고스룩과 메이크업도 있었다) 코스튬까지 차려입었고 같이 걷던 파트너와 딥키스까지 하고 있었다. 더 놀라운 건 그걸 보는 내가 놀라고 있다는거다. 아니 놀라운게 아니라 이건 굉장히 부끄러운거다.

아무리 장애인의 성생활이 간과되는 문화에서 자랐지만 왜 신체의 장애를 가진 사람이 동성애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평생 상상도 못하고 살았을까. 장애인과 성적지향성이라는 두가지 마이너리티의 조합이 상상이 안 됐을까? 아니면 대중 문화가 만든 상품화된 동성애 이상의 인식을 못하고 살았던 걸까. 엄연히 인간이고, 성적 자기 결정권이 있으며 합법적 범위 내에서 마이너한 성적 지향성을 가질 자유가 있는데 장애인이 퀴어퍼레이드에 끼어있다고 놀라는 스스로에 좀 실망하기도 했다. 장애인은 우리 사회의 일원이며 동성애? 남의 성적 지향성 따위를 궁금해하는게 더 실례 아니냐며 떠든건 결국 겉멋이었나?

스스로가 꼰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순간 빼도박도 못할 꼰대가 된다는데 내가 딱 그짝이 아니었나 싶다. 나 정도면 젊은 사람들 입장 배려도 잘 해주고 챙겨주고 생각도 잘 통한다고 주장하며 그들과 소통하려 들지 말고 조용히 빠져주고 지갑이나 여는게 나이 들어서 그나마 욕 덜먹는 길이랬던가. 그 얘기의 본질은 꼰대가 되지 말라기보다는(어차피 나이 들면 내가 어찌 굴건 어린애들 눈에는 다 똑같을 뿐) 내가 이 정도면 훌륭하다는 자만감이 스스로를 편협함의 덫으로 끌고간다는 점이다. 이 우물은 웬만한 바다만큼 넓다고 주장하는 개구리가 우물에서 나갈 일이 평생 있겠느냔 말이지.

평생, 이 정도면 됐다는 생각은 안 하고 살고 싶다. 내가 쌓아올린 가치관을 위협받는 상황을 피해봐야 그 안에 갇히기만 할 뿐 볼 것도 보이지 않고 생각의 틀은 더 작아져만 가는 것 같다.

오늘의 고민 A point of view

초등학교를 졸업 할 무렵이다. 절에 갔는데, 법사님께서 사람이 쌓는 공덕 중에 가장 하급의 공덕이 뭔지 아냐고 물어보셨다.

공덕에도 좋고 나쁜게 있느냐며 의아해하는 내게 대가를 바라고 짓는 공덕이 가장 하급의 공덕이며, 내가 이렇게 착한 일을 했으니 남들이 알아달라는 마음, 하다못해 착한 일을 한 덕으로 다음 생에 귀하게 태어나고자 하는 마음조차도 가지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어린 마음에 굉장히 충격을 받았더랬다. 초등학교 교과서의 교훈적인 이야기들은 꽤 비슷비슷한 구조들이다. 이기적인 어린이가 착한 일을 하는 이웃 어린이가 어른들께 칭찬 받는 걸 보며 반성하거나, 남에게 말하지 않고 어려운 친구를 몰래 도왔다가 알려져서 학교에서 상을 받는다든가 하는 식의 이야기가 많았다. 짐작컨대 교과서 저자들은 너희들도 이렇게 착하게 살고, 착한 사람을 보면서 스스로의 행동을 반성하라는 의도로 썼겠지만 사람의 이기심은 그렇게 교훈적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 그걸 읽으며 책에 나오는 이 아이처럼 굴면 어른들이 날 좋게 봐줄거란 기대를 품고 어른들에게 어필할만한 착한 행동을 익히게 되는 부작용도 있다.

친구들을 도와주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엄마아빠 일을 도와드리고, 어른들께 존댓말을 쓰고 먹은 그릇을 알아서 치우는 이유는 칭찬을 받기 위해서였나, 아니면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하기 때문이었나? 선행은 도구인가, 목적 그 자체인가, 선의 없이 내보이는 선행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선행보다 열등한 것인가?

승진을 위한 인사고과 항목에 충격적이게도 봉사가 있어서 곰곰히 생각해봤다. 신생아 살리기 모자뜨기를 하느니 완제품 모자를 사서 기증하는게 낫고 산동네에서 평생 구경도 못한 연탄을 나르느니 그 시간만큼 돈을 더 내서 연탄을 더 사든 나보다 육체적 능력이 뛰어난 인력을 사게끔 하는게 낫다는 주의로 살아왔는데, 얼마나 어떻게 봉사를 해야하는건지 의아해졌다. 봉사활동 점수가 대학 가는데 필수적인 세대였는데 이건 평생 반복되는구나. 비단 봉사 뿐 아니라 학문에 별 뜻이 없음에도 승진 점수를 채우기 위해 논문을 쓰는 사람도 많고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이 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에 가는 게 아니라 취업을 위해 학위를 따고 이력서를 채우기 위해 자격증을 따는 세상인데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들 어떠랴. 그렇게 별 볼 일 없는 도덕성의 소유자들에게 선행을 강요하기에 사회 전반의 윤리의식이 더 고취될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따지지 말고 시키는 건 일단 다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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