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7/18 시류를 역행하는 입맛에 대처하는 법

어렸을 적부터 외식을 안 하고 집에서 먹는 게 버릇이 되니 입이 꽤나 짧은 편이다.

외가가 함경도에서 월남했기 때문에 이북식 음식이 기준이다. 싱겁고, 재료 본래의 맛을 살리고, 고기와 생선을 많이 쓰고, 무엇보다 음식들이 다 큼직큼직 하다는 것. 사실 밖에서 사 먹는 한식이 맛있게 느껴진 적이 거의 없다. 반찬이라곤 짜고 달기만 하고. 그저 한끼를 때운다는 느낌으로 먹곤 한다. 위생이나 친절의 문제 이전에(사실 이것이야말로 중요한 문제지만), 입에 맞지도 않는 음식을 배고프다는 이유만으로, 그것도 돈 내고 먹기엔 억울하지 않은가. 그래서 맛있는 음식을 든든하게 먹으려면 차라리 중식이나 양식을 택한다. 

한식 - 밥과 반찬 -의 형식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도 한 이유겠다. 한국 사람은 밥심이라는 말을 단 한번도 공감해본 일이 없으니. 그렇다고 빵이나 단 과자 등의 주전부리로 식사를 대체하는 것도 싫어하니 답은 입에 맞는 음식 - 한식이든 기타 등등이건 - 인데 이 기준이 만만치 않게 까다롭다는 건 스스로도 인정한다.

특히 요즘 외식의 트렌드도 내 취향과 역행하는 것 같다.

터무니 없이 매운 음식이 유행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일. 매운 것을 유난히 못 먹기도 하거니와 음식 본래의 맛은 다 사라지고 그저 맵기만 한 음식을 자랑스럽게 내놓는 식당을 보면 난감하기까지 하다. 매운 해물찜, 매운 갈비, 불닭 등등. 그리고 묵은지의 열풍. 원래 짜게 담그는 걸로 봐선 전라도식인 것 같은데, 앞에서 말했듯, 난 짠 음식 싫어한다. 아니, 그 이전에 김치도 별로 안 좋아하긴 한다.;;;깊은 발효의 맛이라 좋아하는 이들도 많건만.

아, 그리고 와인 열풍도 마음에 안 든다. 아는 만큼 보이고 즐길 수 있겠지만, 굳이 스트레스 받아가며 아는 척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와인이든 뭐든 그냥 술이잖아. 입맛에 맞는 와인 마시고 행복해지면 되는 거지, 왜 그렇게들 와인이라면 혹자는 주눅들고 혹자는 열광하며 혹자는 나대는지 모를 일이다 (이게 다 신의 물방울 때문? 설마......)   언젠가 시푸드부페에서 식사를 하는데, 달달한 와인이 나왔다. 해산물 부페도 결국은 맛있게 밥 먹으려고 가는 데다. 대체 왜 밥을 먹으면서 그렇게 혀가 떨어져 나갈 듯한 와인을 마셔야 하는지 의문이지만 다들 맛있다고 하는 바람에 조용히 안 마시고 말았다. 화이트와인을 레드와인만큼 종류별로 신경쓰기 힘들다는 건 안다. 하지만 어차피 부페니까 고기도 많으니 그냥 가벼운 레드와인을 줬어도 무난했을텐데 왜 굳이 달디단 와인을 가져온 걸까. 백화점 세일 때 가봐라. 이만원짜리 화이트 와인도 드라이한 거 달라고 하면 종류별로 나온다. 설마 밥을 못 먹게 하려는 식당측의 음모인가?

사회 생활을 하자니 한끼 이상은 외식을 해야하는데 먹기 싫다고 티 내지도 못하고 따라 다니자니 고민스럽다. 차라리 고깃집 가서 고기나 왕창 구워먹으면 속 편할 텐데, 꼭 특이한 걸 먹으러 갈 일이 생겨서 문제다. 스테이크를 레어로 주문하면 겉은 그럴싸하지만 속은 차디찬 설익은 고깃덩이가 나오고, 리조또를 주문하면 눅눅한 퍼진 쌀죽이 나오기도 한다. 프랜차이즈 초밥집에서 곁다리로 주는 우동은 면이 퍼질대로 퍼져 있기도 하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말도 안되는 반주를 마시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은 살라고 존재하고 인간의 취향은 타협하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스테이크는 잘 구워 달라면 되고(어차피 고기니까), 리조또 대신 오븐스파게티 시키면 되고(같은 이탈리안이다), 프랜차이즈 초밥집 우동은 국물만 마셔도 된다(배는 부르거든). 혀가 떨어질 듯이 달달한 와인?  한켠에 밀어놓고 맥주나 한잔 달라면 된다. 입맛에 맞는 와인을 내 집 냉장고에 넣어둘 여력만 된다면 세상이 그렇게 살기 힘든 곳도 아니다.

by PennyLane | 2009/07/19 04:15 | A point of view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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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사카 at 2009/07/19 07:12
깔끔하고 속 시원한 결론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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